나주오씨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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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오씨 유래

 

나주(금성)오씨대종보 2010년제21호 41~42면/오은열(吳殷烈)글 인용

 

名門 나주오씨는 신라(新羅)시대부터 호남의 큰 고을인 나주에 정착하여 온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왕건(王建 877~ 943)이 궁예의 장수로 있던 시절 909년 나주에 들어와 나주의 토호 나주오씨 오다련(吳多憐)의 딸을 처로 맞이하고 이곳의 세력을 흡수하였으며, 이곳에서 맞이한 장화왕후 아들 무(912~944)가 뒷날 고려 2대왕인 혜종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널리 알려진 명문 가문이다.

 

그러나 다련군 이후의 기록이 요원하고 니주오씨대동보에는 족보상 수선(首先) 인물인 고려 중 엽의 진사 오숙규(吳淑珪)를 중조(中祖)로 하고 그 후손인 고려말 중랑장 오언(吳偃)1로 정립하여 이어온 계통과 역시 후손인 오제(吳偍)1로 정립하여 세계를 이어온 두 계통으로 되어 있다.

 

나주오씨는 광산구 삼도동, 본량동, 평동, 덕동, 나주 동강면, 목포 그리고 전북 고창, 경남, 경북, 서울, 경기 등 전국 각지에 사는 오씨 대다수는 오언 1세조의 자손이다. 사대봉군(四代封君) 한림자손(翰林子孫)으로 14명의 문과급제와 23명의 무과급제를 배출하였고, 진사와 생원으로 높은 벼슬을 한 선조와 학문이 높아 추앙받는 명현달관(名賢達官)이 많아 나주의 8大姓氏·······중 첫째 토반으로 널리 알려진 명문 씨족이다.

 

나주오씨(羅州吳氏)와 금성오씨(錦城吳氏)는 본관(本貫)이 같은 한 씨족이다. 나주오씨 가운데 나 주시 공산면 일대에 모여 사는 사정공파(司正公派)는 오제(吳偍) 1세조의 자손이다. 오언(吳偃) 1세조의 2탁진(卓眞, 松隱堂公派) 자손은 동강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나주오씨는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가구 수는 9,396호이고 인구수는 30,454명으로 되어 있다.

 

1세조 중랑장 오언(吳偃)의 묘소는 광산구 지평동 평가산에 소재하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국)' 이라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매년 39일 평가재(平榎齋)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나주오씨 2고려 중랑상 오계진(吳季眞), 3익산군사 증공조참의 오영달(吳潁達)의 아들4김해부사 신교(愼交), 금성군 신중(愼中), 내금위공 신의(愼儀)의 세 집으로 나뉘었다. 신교의 자손은 지평동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고 '부사공파'라 한다. 4오신중은 진사로서 아들의 훈귀(勳貴)로 순충적덕보조공신 이조참판 금성군(純忠積德補祚功臣 吏曹參判 錦城君)으로 아들 5오자치(吳自治)는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1467(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어 병조참판 나성군으로 지냈고 증이조판서로 나라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내렸는데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다. 그는 광산구 지평동 중방(中芳)마을에서 태어나셨으며, 묘소는 광산구 본량동 원당에 있다.

 

5오자치(吳自治)는 세훈(世勳)과 세익(世翊)이란 아들을 두었다. 6오세훈은 부평도호부사를 지냈고 증직은 의정부 좌찬성 나원군(左贊成 羅原君)으로 봉군되었다. 오세익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6오세훈은 오겸(吳謙), 오인(吳訒), 오원(吳謜, 1511-1596)등 세 아들을 낳았다.

 

7금양군 오겸(錦陽君 吳謙, 1496-1582) 호는 국재(菊齋), 시호(諡號)는 정간공(貞簡公)이며, 1532(중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남평현감을 시작으로 사헌부 장령, 홍문관 교리, 남원부사, 전주부윤, 전라도 관찰사 등을 거쳐 1550(명종 5)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다. 이어 호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1557(명종 12) 예조판서에 승진된 후 호조 · 병조 · 이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571(선조 4) 좌찬성 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올라 나주오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는 1500년대 말 광산구 삼도동 너브뫼(廣山村, 지금의 송산동 일원)에 정착했다. 오겸(吳謙)은 당대에 높은 벼슬을 지낸 터라 마을 어귀에 이를 기념하는 '솟대'가 세워졌고, 그 옆에 하마비가 있다.

 

송산동 내동에는 1744(영조 20)에 건립된 광산사(廣山祠)가 있으며, 양평공(襄平公) 오자치(吳自治)6세손 오응석(吳應錫)이 관수정(觀水亭)을 건립하여 송계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우리 羅州吳氏는 나주 중흥리 일명 흥룡동에서 발상(發祥)하여 오늘에 이르도다. 정묘보에 따르면 羅州吳氏는 三韓초부터 그곳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이었다.

(시조비 碑文, 증보판 전편 15면 게재)

 

• <고려사> 후비열전편에, "莊和王后吳氏는 나주사람이다. 祖父는 富伅, 아버지는 多憐君으로, 대대로 羅州의 木浦에서 살아왔다.(莊和王后吳氏 羅州人 祖富伅 夫多憐君 世家州之木浦"라고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불우 흥룡사편에도, "高麗太祖 莊和王后吳氏의 祖父는 富伅, 아버지는 多憐君으로, 대대로 羅州의 木浦에서 살아왔다.(高麗太祖莊和王后吳氏 祖富伅 父多憐君 世家州之木浦)"라고 실려 있다.

 

나주오씨족보 <정묘보> 泰仁公希吉所記에는 “吳氏 先祖는 본래 羅州 中興里에서 일어났다(吳氏先本起羅州中興里)”라고 실려 있고,

또 <정묘보> 범례의 첫째항에 “吳氏는 三韓初부터 大族이라고 불렀다(吳氏 自三韓初號稱 大族)"라고 실려 있다.

 

<정묘보>에 나주오씨가 三韓初부터 나주 중흥리 일명 흥룡동에서 世居해왔다는 기록은 업으며, <정묘보> 범례에는 '오씨는 三韓初부터 大族이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고, 고려 왕조 正史인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莊和王后吳氏는 대대로 羅州의 현재 영산포 일원)에서 살았다'고 실려 있다.

따라서, 고려 왕조 正史인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 <정묘보>의 希吉所記와 범례를 참고하여 보면, 吳氏는 三韓初以前부터 대대로 나주의 목포(현재 영산포 일원)에서 세거해 왔고 三韓初부터 大族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서 '三韓'이란 마한·변한·진한이 아니고, 통일신라(676~935), 후백제(900~936), 후고구려(→마진→태봉, 901~918) 등 後三國을 말하며, 이는 後三韓이라고도 한다.

고려 건국 및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공신호를 '三韓功臣'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사용했던 화폐를 '三韓通寶'와 '三韓重寶'라고 한다. 또한, 여기에서 '三韓初'라 하면 나 신라 말엽과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개국시기인 서기 900년경을 말한다.

 

참고로, 고려시대 羅州 中興里는 보물 제364호 "羅州 西城門 안 石燈"이 세워져 있었던 나주 서문 내 지역으로, 현재 나주 금계동 일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나주 홍룡동과 중흥리와는 다른 곳이다.

 

[註] 石燈의 팔각형 간주석(杆柱石)에는 1행씩 8줄의 銘文이 있는데, 高麗國羅州中興里에 1093년(고려 宣宗 10년, 요(遼) 大安 9년, 癸酉) 7월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吳氏東文蹟記(竹軒公 時鼎 記)

오씨래동문적기의 함양오상옥 족보 서문과 보성오씨 족보 서문 및 오씨 유전(遺傳)문자를 상고해보면 吳起의 후예 瞻이 동래하였다는 誌石記 중의 전설적 야사를 긍정도 부정도 없이 참고삼아 전재(轉載)하고 있다. (시조비 碑文, 증보판 전편 15면 게재)

 

成根 恒植 兩人은 위와 같이 誌石記 중의 전설적 野史를 긍정도 부정도 없이 참고삼아 吳氏來東文蹟記에 轉載하였다고 竹軒公 時鼎 선조님의 글을 폄훼했다.

그러나 時鼎 선조님은 오씨래동문적기에서 오윤보 지석기, 보성오씨족보 서문, 함양오씨 오 상옥족보 서문, 오씨유전문차 등을 비교설명·평가하면서, 광신지석기의 여러 가지 의문점을 설명하고,

끝으로, 시정(時鼎) 선조님은 족제(族弟) 세주(世胄. 1700~ 1732, 명곡공의 玄孫) 선조님의 기록(보성오씨족보에 諱 淑珪와 淑環 형제, 中郎將 諱가 있다는 기록)도 소개하고,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씀도 자상하게 하였다.

吳氏來東文蹟記는 정묘보 서문 다음에 실려 있으며, 그 기록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오윤보 지석기와 보성오씨 족보, 함양오씨 족보 등과의 비교 설명·평가>

"오윤보의 지석기와 보성오씨 족보에는, 모두 오첨(吳瞻)의 아들인 익(翊)이 처음으로 동방에 와서 아들 수권(守權)을 낳고 수권(守權)이 세 아들을 낳아서 君을 封하였다 라고 기록되었으며, 유전된 문자에는 오첨(吳瞻)이 동방에 와서 세 아들을 낳았다 라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함양오씨 오상옥 족보 서문에도 오첨(吳瞻)이 동방에 왔다라고 하였는데,

첨(瞻)의 아들이 익(翊), 익(翊)의 아들이 수권(守權)이라는 기록은 어찌하여 혹은 쓰여 있고 혹은 쓰여 있지 아니한가? 오히려 불어난 글자인가 아니면 이 기록에 빠진 것인가?

 

또 오윤보의 지석기와 보성오씨 족보 서문 가운데는 두 차례나 지석기를 기록하였는데, 처 음. 기록은 오익(吳翊)이 세 아들을 낳아서 첫째는 함양군(咸陽君)이고 둘째는 해주군(海州君)이며 셋째는 고흥군(高興君)으로 되어 그 후 고흥군(高興君)이 변하여 홍양군(興陽君)이라 하였고,

보성오씨 족보 서문에도 익(翊)이 수권(守權)을 낳고 수권(守權)이 세 아들을 낳으니 현보(賢輔)는 해주군(海州君)이요 현좌(賢佐)는 비안군(庇安君)이고 현필(賢弼)은 화순군(和順君)이라 하였으니,

생각해보건대 부자(父子)가 습봉(=내리 이어 군봉을 받아)하여 고흥(高興)과 흥양(興陽의 지명이 서로 바꾸어 진 것인가? 비안(庇安)과 화순(和順)은 작호(爵號)를 고치어서인가? 오익(吳翊)의 世系에는 오윤보의 지석기와 보성오씨 족보 서문은 모두 첨(瞻)의 아들이 익(翊)이라 하였는데, 오상옥의 족보만은 첨(瞻)의 아들이 응(膺)이라고 기록되었으니 익(翊)은 첨(瞻)의 17대손이 된즉 어찌하여 대수(代數)의 착오가 이처럼 아득한지 모르겠다.

 

또 그 밑에 희(曦)의 아들 익(翊)이 연총(延寵)에게로 출계(出系)하였고 익(翊)의 아들이 경 (璟)이요 경(璟)의 아들이 등란(登蘭)이요 등란(登蘭)의 아들이 수권(守權)이라 하니 함양군(咸陽君) 익(翊)과 수권(守權)의 선후(先後)가 어찌하여 서로 착오(錯誤)되었다는 말인가 옮겨 쓸 때 착오(錯誤)되었다는 말인가?

어느 기록이 잘못인지 알 수 없으니 이는 진실로 유익한 변명(辨明)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전(傳)하는 의심(疑心)난 기록문자를 실었으나 모두 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산거(刪去=없앤 한 문자를 참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의심나는 단서(端緖)를 모아 짐작(斟酌)하여 참고(參考)할 수 있는 근본을 삼고자 한다.“

 

<족제(族弟) 세주(世胄)의 기록 소개>

"1729년(己酉) 여름에 충청도 문의(文義) 삼기리(三岐里)에 사는 오영기(吳英基)의 역전(歷傳=대대로 전하여 내려옴)에 문의현(文義顯) 덕화면(德化面)에 사는 오정기(吳鼎基) 집에 보성오씨 족보가 있으니 그 족보 가운데 휘 숙규(諱 淑珪)와 휘 숙환(諱 淑環) 형제가 있고 또 증랑장의 휘(諱)가 있다고 하니, 합(合)하여 볼진대 동방 오씨(東方吳氏) 성관(姓貫)이 비록 다르나 시조(始祖)는 한 사람이란 설(說)이 망령된 설(說)이 아닌 것 같다.

멀리 고적(古籍)을 상고(詳考)하고 널리 금보(今譜)를 열람해 본즉 선대(先代)의 누계(漏系)를 거의 이을 수 있을 것 같으나, 사는 곳이 벽루(僻陋=아주 외지고 누추한 곳)하고 문견(聞見)이 천박하여 비록 보첩(譜牒)을 수집(修輯)하되 선대(先代)를 계승(繼承)하는데 아직 모자람이 있으니 한탄스럽다.“

 

〈후손들에 대한 당부의 말씀(1) >

“엎드려 원하건대, 제종(諸宗)의 후곤(後昆)들은 소성(小成)한 것에 만족(滿足)하게 생각하지 말고 각자(各自) 척려(惕厲=두렵고 위태로워하는 마음)하여 간혹 오성(吳姓)의 사람을 만나거든 그 족보를 보며 질의(質疑)할 것이요 혹은 문의(文義) 땅을 지나거든 그 사는 곳을 찾아 토론하여 누계(漏系)된 곳을 이어 고치고 닦아서 족보를 완전하게 하면 조상을 빛내고 후손을 복되게 하는 공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후손들에 대한 당부의 말씀(2) >

그리고 時鼎 선조님께서는 吳氏來東文蹟記의 말미에서, "古今文蹟과 見聞한바에 따라 나의 의견을 부쳐 우리 吳氏 기록이 참으로 그러한가의 의문점을 하니 공손히 후곤(후손들이 다시 公私文蹟에 考證을 더하여 위로는 선조의 漏系를 잇고 아래로는 자손의 뒤에 출생한 이를 기록하여 계속하여 新譜 만들기를 기다린다."고 하셨다.

 

<정묘보> 범례 제2항에서도,

“吳氏東來文籍에서 4가지 내용(오윤보지석기, 보성오씨족보서문, 오상옥족보서문, 기타오씨유전문자)을 볼 수 있으나, 모두 그것들이 진실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또한 우리 종중의 世系로 傅하는 바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윤보지석기와 오상옥서문의 요점을 모아 훗날 참고할 수 있도록 책머리에 올려놓았다.(吳氏東來文籍得見四樣 而皆未知其眞的 亦非吾宗世系之傳 故撮其要吳潤寶誌石記及吳相玉序文 語謄書卷首 以備後考)"라고 쓰셨다.

 

아울러, 나주오씨족보 <정묘보>에 실린 '吳氏來東文蹟記'는 정묘보 서문을 쓰고 정묘보 발 행을 주관한 竹軒公 時鼎 선조님의 글인데, 成根 恒植 兩人은 "修譜하신 이산현감 諱大經祖遺文의 입니다."라고 잘못 기록했다. (증보판 전편 35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