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수정(觀水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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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수정(觀水亭) |
나주(금성)오씨대종보 2010년 제11호 48면 오기주 글 인용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내동 마을 남산의 산정(山頂)에 위치해 있다.
이 정자는 이 마을 출신인 세조 때의 명장(名將) 양평공(襄平公) 오자치(吳自治)의 6대손(六代孫) 광산재 오응석(廣山齋 吳應錫)이 창건(創建)한 옛날의 정자이다.
이 정자의 주인(主人)인 광산재 오응석은 조선조 경종(景宗) 1년인 1660년(庚子)에 태어나 영조(英祖) 11년인 1735년에 졸(卒)한 당시의 선비이다. 그는 일찍부터 선고(先考)인 동지공 오이해(同知公 吳以海)에게 학업을 받아 사서집주(四書集註), 육경장구(六經章句) 등을 모두 독파(讀破)하여 침잠완색(沈潛玩索)의 연구를 거듭하였고, 또 가난을 편안하게 여겨 검약(儉約)의 수범(垂範)을 보였으며, 부모(父母)에 대한 효성(孝誠)과 상제(喪祭)에 대한 성례(誠禮)가 극진하여 당시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그가 구곡천(九曲川)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남산의 상정(上頂)에 한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관수(觀水)'라 하고 날마다 이곳에 거처하며 그의 만년을 즐기었다.
그 이름을 '관수'라 한 것은 정자의 바로 앞에 구곡천의 맑은 냇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옛 날의 성인(聖人)인 공자(孔子)의 극칭어수(極稱於水)와 맹자(孟子)의 관수유술(觀水有述)을 본받아 이를 실천에 옮겨 보려는 깊은 의미가 내포(內包)되어 있다. '수'라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물을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물을 보는 것도 사람에 따라 그 각도가 다르다. 보통사람의 경우는 물의 흐르는 그 모습만을 보는데 그치지만 성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맹자의 '관수유술(觀水有述)'은 급(急)한 물의 쉴 새 없는 흐름을 보고 이 물의 수원이 한이 없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이른 말이요, 공자의 '극칭어수(亟稱於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쉴새없이 흐르는 시냇물이 그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마침내 바다까지 이르게 되는
물의 불식지공(不息之工)을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 이 정자를 '관수'라 한 광산재공(廣山齋公)의 본뜻이 여기에 있고, 이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경주한 사람도 광산재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연경치(自然景致)를 즐기고 또 때에 따라 마음속의 옛 친구를 불러 술잔을 나누고 시를 읊으며 또 좌경우사(左經右史)의 많은 서책을 펴고 옛날 성현(聖賢)들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청고(淸高)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세상의 모든 관작(官爵)을 헌신짝처럼 여기고 인간의 헛된 영화를 초개(草芥)처럼 생각 하는 그의 맑은 지조(志操)와 높은 기풍(氣風)이 관수로 인하여 이뤄진 그 소유(所由)를 생각할 때 어찌 이 정자에 대한 고마움을 아니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정자가 1840년경에 폐허가 되어 빈터로 내려오다가 1941년(辛巳)의 중건(重建)과 1987년(丁卯)의 개축(改築)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87년의 개축은 그 어떠한 퇴락(頹落)이나 파손(破損)이 있어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이 정자의 규모 및 구조를 확대하기 위해 일부러 건물 전체를 뜯어 재이(再二)의 중창(重創)을 시도(試圖)한 획기적인 조치이다. 문화재 가치(文化財 價値)를 인정한 행정당국의 특별지원과 여러 후손들의 적극적인 협력에 의해 당시의 개축(改築)이 이루어졌고, 또 이를 계기로 오늘의 건물이 서게 되었다.
도리 석초(石礎),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八作)지붕으로 되어 있는 이 정자는 그의 내부시설이 매우 완결(完潔)하여 청신(淸新)한 기풍(氣風)을 풍겨주고 있다. 정측면(正側面) 모두가 3칸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 별도의 마루 거실(居室)이 있으며 전면(前面)을 제외한 좌우후면(左右後面)에 손잡이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또 출입문을 제외한 주변사방(周邊四方)이 견고한 석축(石築) 토담으로 둘러있고 전후좌우(前後左右)의 뜰이 모두 석재(石材)로 깔려있다.
정자 입구에는 창건 당시 주인의 손으로 심은듯한 석주의 늙은 괴목(槐木)이 서있고, 그 옆에 이 정자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碑石)이 있으며, 또 그 옆에 정자로 오르는 층계(層階)의 계단이 놓여있다.
정내(亭內)에는 '관수정(觀水亭)'이라는 대서(大書)석자가 현판으로 걸려있고 15개의 판각 시문(板刻 詩文)이 괘벽(掛壁)되어 있으며, 이 정자의 풍치(風致)를 찬미한 네 개의 주련(柱聯)족자가 전면(前面) 기둥에 부착되어 있다.
이 족자의 내용에 의하면 「북쪽으로 용진산(聳珍山)의 돌아간 구름이 있고 동쪽으로 어등산(魚登山)의 밝은 달이 있으며 서쪽으로 사랑산(獅狼山)의 저녁노을이 있고 남쪽으로 복룡산(伏龍山)의 갠 아지랑이가 있다」라고 되어있다. 이 족자의 이러한 내용만 보더라도 이 정자의 경치가 어떠함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은 바 있다.
이 때문에 경관(景觀)문제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하고 이 정자의 오늘이 있게 된 그 배후에는 당시의 광산군수 박준식(光山郡守 朴俊植)의 적극적인 지원과 후손(後孫) 오기주(吳基柱), 오근남(吳根南), 오철수(吳哲洙) 등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그리고 관계 시문중(詩文中) 이 정자의 소재(所在)를 현재(現在)의 나주(羅州)인 금성(錦城)으로 표시(表示)한 것은 그 당시 이 지역이 광주(光州)가 아닌 나주(羅州)로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原來)이 지역이 나주(羅州)소관으로 되어 있었으나,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1949년 8월 14일, 나주(羅州)에서 광산(光山)으로 이관(移管)되었고 또 1988년 1월 1일 전남 광산(全南 光山)에서 광주직할시(光州直轄市)로 편입(編入)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관수정 원운(觀水亭原韻)
十載營成屋數椽 登斯聘目一長川淸流遠走東南港碧色同連上下天雨後群星迎客浴夜來明月近人圓 觀瀾有述無驚動坐久閒偷物外仙 - 廣山齋 吳應錫 -
십년간의 적공(績功)으로 두어 서끌 집을 지어, 올라서서 바라보니 긴 냇물이 뻗어있네. 맑은 물은 멀리 흘러 동남항(東南港)을 달려가고, 푸른 빛이 높이 쌓여 상하천(上下天)을 연했도다. 비 온 뒤의 맑은 별빛 목욕(沐浴)하듯 깨끗하고, 어둔 밤중 밝은 달은 구슬처럼 두렷하네. 물의 이치 깨달아서 이 마음이 안정(安定)되니, 오래도록 좌정하여 물외선(物外仙)이 되었도다.
-광산재(廣山齋) 오응석(吳應錫)-
▣ 관수정기(觀水亭記)
지난 조선조(朝鮮朝) 경종(景宗) 영조(英祖)간의 사이에 광산재(廣山齋) 오공(吳公) 금성(錦城)에 그의 몸을 숨기어 높은 지조를 지키었다. 일찍 그가 살고 있는 북쪽 남산(南山)의 상정(上頂) 구곡천(九曲川) 위에 나아가 모든 띠를 베어 없애고 그 위에 한 정자를 지었다. 그리고 뜰앞에 네주의 괴목을 심어 그 가운데 소요 일생을 마치었다.
중세(中世)에 이 정자가 무너져 없어짐에 따라 차가운 연기, 거친 잡초가 이곳에 가득하여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설프게 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매우 슬프게 생각한 현손 형수가 이 문제를 종회(宗會)에 부쳐 지난 신사(辛巳)1941년 봄 옛날의 그 자리에 이 정자를 다시 중건하였다.
기와 마룻대와 기둥, 서까래 등의 모든 규모가 옛날보다 오히려 승하였고 또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 정자의 기문을 부탁하면서 두세번의 내왕이 거듭되었다. 내 일찍 석문(石門) 용진의 사이를 지나면서 이 지역의 시내와 산이 모두 밝고 넓어 고요한 그 경관 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흐뭇함을 느꼈다. 오씨(吳氏)의 성(姓)을 가진 여러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왕왕 뛰어난 높은 선비가 태어났고 또 산수를 배경으로 한 정자 다락 등의 누정(樓亭)과 강학(講學)을 위주로 한 재실학궁(齋室學宮) 등의 건물이 바둑판처럼 즐비하였다.
이른바 '관수'라는 이 정자는 구곡(九曲)천의 개울이 멀리 석문(石門)으로부터 내려오면서 흐름을 따라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간 편이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이기 때문에 그의 깊이는 비록 허리정도에 불과하지만 그의 물결이 세차 밤낮으로 쉬지 않은 그 모습은 강하(江河)와 다를바 없다. 강하의 큰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크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구곡의 적은 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적게 여기지 않은 그의 넓은 마음을 생각할 때 당시 이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관수라 한 것은 그의 본뜻이 중니(仲尼)의 수재수재(水哉水哉)라는 그 말을 인용하여 일부러 그러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공(公)이 몰(沒)한 뒤에 이 정자가 황폐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고 오직 공산유수(空山流水)만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지가 어언 백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로 인하여 공의 아름다운 유적이 날로 잊혀져가고 있던 차에 때마침 어진 후손이 있어 능히 옛날의 선조를 생각하여 이미 없어진 이 정자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비록 이 일이 한 집안의 사사로운 문제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실을 보고 듣는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움직이게 하는 경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이 정자가 다시 세워짐에 따라 공의 유적이 다시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근원의 뿌리가 있는 자는 그 결과가 이처럼 아름답다」라고 하는 옛말이 오늘의 이러한 경우를 두고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의 이름은 응석(應錫)으로 평생에 벼슬을 싫어하여 오직 산수도사(山水圖史)만을 즐겨 하는 뛰어난 선비이다. 이 앞에 이미 밝힌바 있는 "높은 사람 숨은 선비가 많다"고 하는 이 뜻은 공을 포함한 오씨(吳氏) 문중(門中)의 여러 어진 이를 가리켜 이른 말이다.
- 병술(丙戌)년 3월 상한(上澣)에 광산(光山) 김문옥(金文鈺)이 이 글을 기록함 -
▣ 관수정 중건(觀水亭重建) 속기(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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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水亭重建續記 亭扁日觀水者盖取孔夫子臨水歎美之義也自古賢人達士樂山樂水而東南魚登伏龍兩山之間有松山橋橋頭二水涯流莊觀而望懐快闊西獅狼湧珍兩峯相應秀美鹽海之野鷹之璞靠山臨水生涯饒足而裕後可居吉地也夫木晦於根樹之盛衰物之理也子孝親欲傳遺業人之情也然而自古以來傳守者鮮而荒廢者多何哉盖傳守之難於創業而興廢之理固然也光山郡三道面內洞有楓林而其上有亭卽廣山齋處士 吳公應錫之消遙樂道處而其後裔世居于三百餘載而前此已有重建之役又於今年以撤舊從新之義更圖重創后孫追慕之誠至而由來者遠庶幾有文化財價値觀故本郡文化財支援於此配定庸副其誠公之裔基柱之彈誠根南之賢勞諸孫之竭力舊貌革新善且嘉尙惟願後日處士吳公之裔當龜鑑於今日之裔而繼承勵精焉 歲丁卯菊秋 光山郡守 咸陽 朴俊植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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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의 이름을 '관수'라 한 것은 물의 흐름을 보고 극구(極口)의 칭찬을 아끼지 않은 공부자(孔子) 탄서(嘆逝)의 뜻을 취하여 이른 말이다. 옛날부터 뛰어난 어진 선비들 중 거의 산수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 지역 동남(東南) 양쪽에 복룡(伏龍), 어등(魚登)의 두 산이 있다. 이 두 산을 중심으로 송산교(松山橋)라는 다리가 있고, 이 다리의 머리위에 두 곳의 물이 서로 만나 다시 되돌아가는 회두(匯頭)의 물결이 있다. 참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여주는 아름다운 장관이다. 또 서북 양쪽으로는 용진(湧, 사랑)의 두 산이 서로 얼굴을 맞대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염해(鹽海)의 기름진 들과 응봉(鷹峰)의 투박한 박석이 산에 기대어 물에 임하는 높은 자세로 이 사이를 점령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이 매우 요족(饒足)하여 그의 혜택이 후손에까지 미치고 있다. 참으로 가하 살만한 좋은 땅임이 분명하다.
대개 나무가 뿌리로 인하여 살고 있지만 그의 지엽이 무성하여 잘 자랄 때가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생물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려는 아들의 처지로서 부모의 남긴 업적을 오래 전하도록 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선대의 유업을 지키는 것보다 도리어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는 지키어 보전하는 그 어려움이 창업(創業)하는 그 어려움보다 더 어려울 뿐 아니라 흥하고 폐하는 그 이치가 서로 순환(循環)하여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산(光山)고을의 삼도면(三道面) 내동(丙洞)이라는 마을에 아름다운 풍림(楓林)이 있고 이 풍림의 위에 아담한 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이 마을 출신인 광산재 처사(廣山齋處士) 오공(吳公) 응석(應錫)이 이 정자를 중심으로 그의 몸을 숨겨 한가히 노닐며 도(道)를 즐겨한 곳이다.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여기에 산지가 삼백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또 이 정자의 보전을 위해 두 세 번의 중건(重建)이 거듭되었다.
이처럼 선조의 유업을 전수하려는 후손들의 정성이 지극하였고 또 그의 유래가 매우 오래 되었다. 이 정자의 이러한 내력으로 보아 어느 정도 문화재(文化財)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본군(本郡)의 문화재 지원금(支援金)을 이곳에 배정(配定)하기로 결정하였다.
본군(本郡)의 이러한 결정은 물론 이 정자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는데서 비롯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를 보존하려는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을 참작한 점도 없지 않다. 공(公)의 어진 후손인 기주(基柱), 근남(根南)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타 여러 자손들의 적극적인 협력에 의해 이 정자의 옛 모습이 다시 혁신(革新)되어 새로운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었다.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컨대 이 뒤에 태어난 처사(處士) 오공(吳公)의 어진 자손들도 마땅히 오늘의 이 일을 거울삼아 더욱 이 정자의 계승보 전에 정려하여 줄 것을 부탁하는 바이다.
-정묘(丁卯, 1987)년 국화꽃 피는 가을에 광산군수(光山郡守) 함양(咸陽) 박준식(朴俊植)이 삼가 이 글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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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次觀水亭韻 水色觀望肯搆椽 雙溪涯合漲前川 龍峯積玉橋懸口 魚岳藏風日出天 追慕先生心鏡郎 料知處士意珠圓 無貪遠名害千財 去世應知紫府仙 -丁卯秋 慶州 金商順 謹稿 - |
삼가 관수정 운을 따라 지음 맑은 물빛 바라보며 두어 서끌 집을 지니 두 시내가 서로 모여 앞 개울을 이뤘다. 용봉(龍峯)위에 쌓인 옥(玉)돌 다리 어귀 매달렸고 어악(魚岳)에서 부는 바람 밝은 날이 출천(出天)하네. 거울같은 선생(先生) 마음 한이 없이 그리우니 이 처사(處士)의 높은 뜻이 구슬처럼 두렷하네. 탐욕(貪欲)없는 맑은 절개 천재(千載)까지 전해지니 세상 떠난 그 이후에 하늘 신선 되었으리. -정묘(丁卯)년 가을에 경주(慶州) 김상순(金商順)이 삼가 이 시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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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樓亭題詠』을 광주직할시 주관으로 간행 할 때 자료 수집· 정리에 참여한 바 있어서 첨종(僉宗)의 이해를 돕고자 지면상 일부를 기록하는 것 입니다.
[참고문헌]
광주직할시 『樓亭題詠』 太陽社, 1992, P51~105.
광산문화원 『원장 류복현』 『빛고을』 2009, P42~45
오왕근 『羅州吳氏 世稿』 1972.